무고한 청년이 하루아침에 강간 살인 토막 용의자로 전국에 이름이 박히고,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는데도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1화를 보고 너무 불쌍해서 당분간 2화를 못 봤습니다. 그러다 마음 다잡고 앉았더니 2, 3, 4화를 한 번에 내리 달렸습니다.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조각도시 얘기입니다.

누명 설정이 이렇게 정교할 수 있나
조각도시는 영화 조작된 도시의 확장판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원작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소재는 괜찮은데 연출이 아쉬웠다"고 느끼는 경우가 꽤 있더라고요. 저도 비슷하게 봤습니다. 그래서 시리즈 리부트 소식이 나왔을 때 반신반의했는데, 실제로 보니 제작진이 영화에서 못다 푼 분풀이를 제대로 한 느낌이었습니다.
누명을 씌우는 방식이 정말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박태중(지창욱)이 피해자 집에 배달을 갔다는 사실, 도착 후 7분의 시간 공백, 사체가 유기된 장소 근처에서 피해자 핸드폰을 건넨 장면, 심지어 몸 안에서 나온 DNA까지. 하나하나 따지면 반박할 여지가 있는데, 묶어서 보면 완벽히 한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걸 법정 장르에서는 circumstantial evidence, 즉 정황 증거라고 부릅니다. 정황 증거란 범행을 직접 입증하는 물증은 아니지만, 여러 상황을 종합해 범죄 사실을 추론할 수 있게 하는 간접 증거를 의미합니다. 드라마는 이 정황 증거들을 마치 퍼즐처럼 맞춰가며 무고한 사람을 조여듭니다.
저도 처음엔 "아무리 그래도 7분 사이에 토막 살인이 가능하냐"고 분통이 터졌습니다. 그런데 검사가 그 불가능함을 인정하면서도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방식이 오히려 더 소름이었습니다. 결국 개별 증거의 허점보다 전체 서사를 장악하는 쪽이 이긴다는 걸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 법정 드라마 구조를 오랜만에 이렇게 제대로 활용한 작품을 본 게 개인적으로는 꽤 오랜만이었습니다.
- 배달 기록상 7분 공백 → 피해자 집에서의 의심스러운 체류 시간으로 활용
- 할머니 캐리어 운반 장면 → 사체 이동 수단과 색상 일치
- 피해자 핸드폰 GPS 동선 → 박태중 이동 경로와 거의 완벽하게 겹침
- 피해자 몸 안의 DNA → 물리적으로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핵심 증거
지창욱 연기, 그리고 도경수의 연기 변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지창욱이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감정선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눈빛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진짜 그 말 그대로였습니다. 억울함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각성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눈에 보이게 쌓이더라고요.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 즉 주인공이 이야기 안에서 겪는 내면 변화의 궤적이 이렇게 체감되는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2화가 채 끝나기 전에 감정이입이 완전히 됐고, 이후 액션 씬에서는 숨을 죽이고 봤습니다.
도경수는 악역 요한으로 등장하는데, 본인이 악역이 처음이라고 밝힌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도경수를 처음 배우로 인식한 게 이제야인데, 연기 스펙트럼이 이렇게 넓은 사람이었나 싶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캐릭터의 특이함은 사이코패스인데 해맑다는 겁니다. 보통 악역이 위협적인 분위기로 압박한다면, 요한은 어린아이처럼 즐겁게 타인의 인생을 망가뜨립니다. 그 불쾌한 생동감이 화면에서 살아있는 느낌이 났습니다. 이런 악역 유형을 심리학에서는 마키아벨리안(Machiavellian) 성향과 결합된 사이코패시라고 분류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마키아벨리안이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 조종하는 성향을 뜻합니다(출처: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양동근도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습니다. 이쪽도 존재감이 확실하더라고요. 캐릭터 하나하나가 허투루 설정되지 않은 티가 나는 구성입니다.

탈출 이후, 이 드라마가 향하는 곳
4화까지 보고 나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교도소 선배 재소자가 태중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살아 있는 건 보너스로 주신 거라고." 저는 이 장면에서 드라마 전체의 주제가 요약된다고 봤습니다. 억울한 누명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억울함에 삼켜져서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것이라는 메시지요.
서사 구조를 보면 조각도시는 복수극(revenge thriller)의 형식을 기반으로 합니다. 복수극이란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주인공이 그 피해의 원인 제공자를 향해 정의를 되찾아가는 장르적 서사를 말합니다. 이 장르는 국내 장르물이 강세를 보인 분야이기도 한데, 조각도시는 여기에 탈출 스릴러와 액션을 결합한다는 예고가 이미 예고편에서 드러났습니다. 레이싱 씬이 예고편에 등장하는 걸 보고 저도 기대치가 올라갔습니다. 단순 복수극에서 장르를 쌓아올리는 방식은 모범택시, 최악의 악, 하이노 같은 디즈니플러스 장르물의 공통 문법이기도 합니다(출처: Disney+ 한국 공식 사이트).
다만 한 가지 개인적으로 걸리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악의 구조가 워낙 거대하게 설정되다 보니, 나중에 태중이 혼자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풀어낼지가 5, 6화의 관건이 될 것 같고, 저는 그 부분이 지금 가장 궁금합니다. 태중이 각성하고 나서 보여주는 액션 씬은 이미 4화에서도 충분히 증명됐으니, 나머지는 서사가 어떻게 받쳐주느냐 달린 것 같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조각도시는 영화 조작된 도시를 먼저 봐야 하나요?
A. 저는 영화를 먼저 봤지만, 드라마 자체가 독립적인 세계관으로 새로 설계되어 있어서 영화를 모르고 봐도 이해에 전혀 지장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영화를 안 본 쪽이 더 신선하게 즐길 수도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더라고요.
Q. 1화가 너무 힘들어서 못 보겠는데 계속 봐야 할까요?
A. 저도 1화 이후 며칠을 쉬었습니다. 그 감정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다만 2화부터 전개 속도가 빨라지고, 주인공이 무너지는 것에서 버티는 쪽으로 방향이 조금씩 바뀝니다. 조금만 참고 보시면 그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계속 보게 되더라고요, 제 경험상은 그랬습니다.
Q. 도경수 악역 연기가 진짜 어색하지 않나요?
A.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는데, 저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기존 악역의 문법을 따르지 않고, 해맑고 즐거운 방식으로 나쁜 짓을 하는 캐릭터 특성을 도경수가 꽤 자연스럽게 소화했습니다. 처음이라고 밝힌 게 믿기지 않을 정도라는 반응이 많더라고요.
Q.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장면이 많나요?
A. 장르물 특성상 수위가 높은 편입니다. 누명을 씌우는 과정에서 토막 살인 사건이 배경이 되고, 교도소 내 폭행 장면도 등장합니다. 잔인한 묘사에 예민하신 분이라면 미리 감안하고 보시는 게 좋습니다. 저도 처음 몇 장면은 좀 세다고 느꼈습니다.
결론
4화까지 본 소감은 단순합니다. 오랜만에 제대로 만든 장르물이었습니다. 지창욱이 이 역할을 위해 있는 배우처럼 느껴졌고, 도경수의 악역 변신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법정 파트에서의 정황 증거 구조, 교도소 파트에서의 생존기, 그리고 탈출 시퀀스까지 전개가 쉬지 않았습니다.
완성도에 대한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악의 구조가 너무 거대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후반부가 설득력 있게 수렴할 수 있을지 여부입니다. 저도 그 부분은 아직 판단 유보 중입니다. 5화 이후를 보고 나서 전체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여지를 두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지금 당장은 얼른 다음 화가 나오길 바라는 마음이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