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넷플릭스 <폭싹 속았쑤다>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나 농촌 드라마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제주도라는 공간과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언어, 풍속, 삶의 방식까지 총체적으로 담아낸 문화적 콘텐츠라 평가받습니다.
사투리를 그냥 설정 차원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지역의 정체성을 말로 풀어낸 구조로써 드라마 내내 중요한 언어적 장치가 됩니다. 또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구조 속에서 제주도라는 섬의 변화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깊이 있게 다뤄집니다.
제주 사투리의 온전한 복원 – 드라마가 언어를 살렸다
<폭싹 속았쑤다>의 핵심 미덕 중 하나는 제주 사투리를 원형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드라마에서 지역 방언은 ‘억양 흉내’에 머물러 있지만, 이 드라마는 다릅니다. 대본부터 현장 연기까지 철저한 언어 고증을 거쳐 진짜 제주인의 말을 담아냅니다. 사투리 강사가 함께 참여하고, 일부 배우들은 제주도민의 실제 발음을 수개월 동안 학습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극 중 순덕이 아이를 꾸짖으며 말하는 “그라고 허믄 안되는겨”라는 대사는, 단순한 꾸중이 아니라 모성, 전통적 질서, 어른의 도리를 담은 복합적 언어입니다. “속았쑤다”라는 표현 자체가 제주도 말로 ‘완전히 속았다’는 뜻으로, 제목부터 이 드라마가 제주어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청자 입장에서도 사투리를 이해하기 위해 자막을 따라 읽거나 자연스럽게 억양을 익히게 되면서, 드라마를 넘어선 언어 문화 학습의 효과까지 부가적으로 얻는 경험이 생깁니다.
제주 전통문화의 구현 – 농업, 공동체, 제례
<폭싹 속았쑤다>는 제주도의 자연과 노동, 그리고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재현해냅니다. 극 중 감귤 농사, 김장, 제사, 장례 문화 등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극의 중심 흐름을 형성하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물 간의 감정 충돌은 전통과 현대, 개인과 공동체 간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주인공 순덕이 갯바위에서 해초를 채취하거나, 마을 어른에게 정성껏 밥상을 차리는 장면은 한국 전통 여성상의 현실적인 묘사이자, 제주 여성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지혜’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또한 제주만의 독특한 제사 문화도 드라마에 자주 등장합니다. 제물의 구성, 절차, 상차림 방식은 서울 중심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로컬 요소로, 문화적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제주라는 정서적 공간 – 변화와 세대의 충돌
드라마는 1950년대 순덕의 어린 시절부터, 80~90년대 자식들의 성장, 그리고 2000년대 노년 시기를 시간대별로 교차해 보여줍니다. 이 안에서 제주도의 사회 변화, 경제적 성장, 인구 이동, 관광화로 인한 지역 변화까지 포괄적으로 담깁니다.
순덕은 전통적인 제주 여성이자, 남편 없이 혼자 두 아들을 키운 ‘가장’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복합적 캐릭터입니다. 그녀가 살아온 제주도는 점차 도시화되고, 자식들은 육지로 떠나며, 그녀 혼자 남은 집과 땅은 제주 전통문화의 흔적이자 무게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흐름은 제주가 단지 ‘예쁜 섬’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시간이 흐르고, 아픔이 남는 삶의 공간임을 강조합니다.
감정선의 완성 – 모성과 화해, 그리고 시대의 관찰자
<폭싹 속았쑤다>는 가족 서사로도 뛰어납니다. 순덕과 두 아들(동석, 동찬)의 갈등과 화해는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의 서사입니다.
극 중 동석은 어머니의 강압적인 사랑에 지쳐 반발하고, 결국 육지로 떠나지만, 수년 후 어머니가 늙고 병들었을 때 다시 돌아와 화해하는 장면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눈물을 자아낸 명장면입니다.
이때도 두 사람의 화해는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밥 좀 묵어라”, “거 다 필요 없는겨” 같은 사투리 대사로 감정을 전달합니다. 이러한 점이 바로 <폭싹 속았쑤다>가 감정 전달의 방식조차도 제주답게 했다는 증거입니다.
결론: 지역의 이야기에서 보편을 만든 작품
<폭싹 속았쑤다>는 ‘제주’라는 특정 지역을 다뤘지만, 그 안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족, 시간, 상처, 회복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제주 사투리와 풍습, 일상의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감정과 서사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로 작동하며, 이 작품은 단순한 로컬 드라마를 넘어 한국 드라마 역사 속 지역문화 재현의 기준점으로 남을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